A1. 소아물리치료 이야기/A101.재활디딤돌(뇌병변)

[재활디딤돌] "우리 어떻게 미끄럼틀을 거꾸로 올라갈 수 있었을까?" #15

왕구리 2021. 9. 14. 12:33

 

"오늘도 밖에서 하자고 하던가요?"

 

매번 월요일이 되면 어머님께 여쭤봅니다. 

오늘은 어디서 하고 싶은지, 기분이 어떤지 말이지요.

 

오늘도 역시 밖에서 하고 싶다고 들었는데, 막상 만나니 아이의 얼굴이 어둡습니다.

뭔가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랄까요.

 

"오늘은 안에서 할까? 밖에 나가지 말까?"

물어보니 고개를 저으며 나갈 거라고 합니다.

 

 

엄마와 인사하고, 아이와 길을 나섭니다.

보통은 재잘재잘 수다쟁이 아이가 오늘은 발을 떼자마자 손을 벌리며 이야기합니다.

 

"안아줘~ 업어줘~"

"미안~ 선생님은 널 업어줄 수 없어. 우리 조금만 힘내서 걸어볼까? 많이 피곤하구나?"

"힝~"

 

오늘따라 칭얼거림이 있는 아이를 보며 생각에 잠겨봅니다.

'왜 이렇게 피곤한데, 밖에서 하자고 했을까?'

 

그래도 이런 저런 수다로 유도(?)하며 나름대로는 즐겁게 잘 가고 있었어요.

근처 슈퍼마켓까지 가서 먹기로 한 간식을 사고, 놀이터로 뚜벅뚜벅 걸어갔습니다.

 

간식을 손에 쥐니, 신이 나는지 흠뻑 웃습니다.

 

"간식부터 먹고 하자!"

아이는 당당하게 의자에 앉으며 말했습니다.

 

장난감이 들어있는 초콜릿을 뜯어서 맛나게 냠냠 먹고는, 장난감도 이리저리 둘러봅니다.

작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장난감 조립이 맘대로 되지 않았는지

짜증 나는 투로 바닥에 던져버리는 아이입니다.

 

"주워."

 

매번 나름 상냥하게 말하던 선생님이 정색하고 말하니 아이가 얼음이 되어 버립니다.

주울 때까지 기다려준 후 아이에게 말해주었습니다.

 

"쓰레기를 바닥에 버리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야.

선생님이 갑자기 그렇게 말해서 당황했지?

그렇지만 다음에도 선생님은 네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똑같이 말할 거야.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쓰레기를 바닥에 버리지 말자! 알았지?"

 

아이는 자기도 다 안다는 듯, 쿨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끄럼틀로 달려갑니다.

 


그런데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아이였습니다.

 

미끄럼틀로 달려가더니 거꾸로 올라가고 싶다고 이야기합니다.

 

미끄럼틀을 거꾸로 올라가는 건 위험하기도 하고, 힘이 드는 도전이긴 하지만

아이가 먼저 제안한 과제를 그냥 지나치기 싫은 마음이었습니다.

 

"좋아! 한번 해보자!"

 

그래서 시작한 미끄럼틀 거꾸로 오르기 대작전

한 꼬마는 죽을 둥 살 둥 기어서 올라가고, 한 어른은 낑낑대며 아이의 엉덩이를 받쳐줍니다.

가만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무더위 한낮에 우리는

노인정을 방불케 하는 할머님 관객을 옆에 두고

결국 거꾸로 오르기에 성공했습니다.

 

신이 난 아이는 또 하자고 했지만,

너무 힘들다며 뻗어버린 선생님 때문에 다시 도전은 성사되지 못했지요.

 

할머니들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박수를 쳐주며, 대견하다 멋지다 해주셨습니다.

 

 


땀이 흠뻑, 목까지 차오르는 갈증을 음료수로 달래며 바닥에 주저앉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우리 어떻게 미끄럼틀을 거꾸로 올라갈 수 있었을까?"

라고 물으니

"재밌었어~ 우리 다음엔 밧줄을 가져와서 원숭이 놀이를 해볼까?"

라며 바로 옆 나무를 가리키며 눈을 반짝입니다.

 

"너 집에 밧줄도 있어??"

라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더니

"없어~"

라네요. 집에 밧줄이 왜 있냐고 눈으로 되묻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렇구나, 그래 그러자 그럼"

 

아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

또 수다 한마당이 펼쳐집니다.

주절주절 종알종알

 

돌아가는 길의 아이가 유독 이뻐 보였는지,

지나가는 할머니들이 한 마디씩 던지셨고,

어떤 할머니는 주머니에서 돈을 주시려고까지 하셨습니다.

 

피곤함과 짜증으로 시작한 시간이 흥분과 기쁨으로 마무리된 시간이었네요.

하긴,

저만해도 하루를 살아내다 보면 좋았다가 힘들었다가, 짜증 났다가 흥이 오르다가, 몇 번씩이고 오르내림 하는 걸 보면

아이도 그렇겠지라고 당연히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기분이 안 좋아 오늘 수업이 어렵겠네..라고 걱정부터 한 나 자신을 조금 돌아보며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느껴지는 바람에 땀을 식혀봅니다.

 


물음표보다 동그라미를,

장애보다 아이가,

치료보다 성장을,

재활디딤돌.


재활디딤돌 프로그램은

도봉구에 거주하는 만 6세 이하의 정도가 심한 뇌병변 장애 아동과 가정이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지속적이며, 일상생활환경 중심 프로그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