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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가장 중요한 곳에, 가장 우선적으로 존재하는 장애

미국에 머무른지 한달 가까이 지나고 있다.이곳에 온지 이틀째 되던 날, 시차 적응도 되지 않은 상태로 디즈니크루즈를 탔다.꿈과 환상이 이루어지는 곳.실제로 크루즈에서의 시간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다채로웠고, 화려했다.마치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모두 다 넣어놓은 듯한, 디즈니 애니메이션 한복판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그 수많은 것 중 나에게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이 떠오른다.첫번째는 선상에서 물놀이를 하며 만났던 꽤 많은 중증 장애아동들이다.이 아이들도 물놀이를 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던 크루즈의 구조와 그것이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은 가장 처음 만난 신기함이었다.두번째는 매일 저녁 펼쳐진 대극장에서의 화려한 뮤지컬에서 겪은 상황이다.뒷줄 어딘가에 자폐 성향을 가진 사람이 있었고, 뮤지컬..

실천 이야기 2025.02.16

#11. 별 것 아닌 여행

미국에 온지 벌써 2주일이 넘어가고 있다.어딜 가도 차로 이동해야 하는 곳,소비를 부르는 마트, 쇼핑몰이 매우 많은 곳,도무지 무슨 맛으로 먹는지 모를 음식이 많은 곳,하늘이 비현실적으로 예쁜 곳,나무가 많은 곳.내가 있는 이곳, 서배너의 한 작은 마을 생활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다.처형네의 도움이 크다.여행이 아닌 삶을 살아본다는 것 자체가 귀한 경험이 되고 있다.조카들은 미국에 적응하면서 느끼고 알아온 것들을 반짝이는 눈으로 알려준다.그래서 미국에 대해 조금이라도 빨리, 더 많이 느껴보고 있다.그래서 그럴까,미국이란 나라에서 갑작스레 '삶'을 살아가야 했던 처형네의 조심스러움이 나에게도 전해진 듯 싶다.여행자라면 문화를 몰라도, 규칙을 몰라도 어느 정도 용인이 되지만일상을 산다면 다르기 때문이다. 삶..

삶 이야기 2025.02.11

#10. 달리기

새로운 곳에 갔을 때,달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나이를 먹을수록, 여행을 떠날수록다른 짐보다는 조깅화 하나, 책 하나를 꼭 챙기겠노라는 생각이 커진다. 이번 미국여행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달리고 싶다. 꽤나 간절했다.바닷가에 갔다. 사우스 캐롤라이나주의 힐튼 헤드 아일랜드라는 곳이다.멋진 바닷가는 수 없이 많이 봐왔으나이곳처럼 광활하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초광각렌즈를 끼고 세상을 바라본 듯,내 시야에 걸리는 모든 풍경에 수평선이 그어져 있다.수평에 강박이 있는 나로썬 희열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따뜻한(덥기까지 한) 서배너 날씨와는 다르게 찹찹한 바람이 분다.다행히 햇살은 따뜻해 담요를 덮고 따수움을 맛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달리고 싶다. 못챙긴 신발 대신 맨발..

삶 이야기 2025.02.07

#9. 내려놓음

실망시키면 어떻게 하지? 그게 너무 두려워.5살에 처음 만나 14년이 지나도록 깊이 사랑해 온,소중한 조카의 고민이 마음을 울렸다.성인이 될 준비를 해 나가는 한 사람의 성장통을 함께 겪는 것은고통스럽지만 그 자체로 매우 아름다운 경험이다.선택에는 답이 없다.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선택을 내린 후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뿐.그 선택에 책임과 노력을 다하는 것뿐임을 알아가고 있다.지난해 11월, 제주의 한 책방에서 만난 글귀는 나에게 하나의 이정표가 되어 가고 있다.신이여,어쩔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함을 주시고,어쩔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주시고,그리고 이를 구별하는 지혜도 주소서.내려놓아도 괜찮아.니가 가진 부담, 긴장, 경직, 외로움을 가만히 들여다보고,그것들도 너라는 사실을,너에게 그..

삶 이야기 2025.02.02

#8. '다음'이 없는 순간

햇살이 어스름하게 비치기 시작하는 새벽.아직 컴컴하고 조용한 집 안 침대에 누워 잠시 동안 고민했다.일어날까? 아니면 더 잘까?어차피 누워 있어도 다시 잠들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괜히 더 닝기적거리고 싶었던 마음이었을까.아내와 아이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일어났다.화장실에 가 입을 헹구고, 눈을 닦았다.고요하게 어두운 집 한 켠의 소파에 앉아 조명을 켜고 책을 들었다.으레 깔아 두던 피아노 연주곡도 틀지 않은 정적 안에서 순간에 집중하며 책을 읽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한국에서는 뭐에 그리 바쁘고 쫓기듯 살았을까?생각해 보면 항상 '다음'을 생각하고, 준비하는 데 생활이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었지 싶다.새벽에 눈이 떠지더라도, 그다음의 출근을.잠시 여유가 있더라도, 이제 뭐 먹지 하는 식사를.청소를, ..

삶 이야기 2025.01.31

#7. STOP

STOP 표지판이 보이면 속도를 0으로 만들고, 1~2초 주변을 살피고 출발한다.스쿨버스가 정차하면 같은 도로뿐 아니라 반대편 도로의 차들도 모두 멈춘다.미국의 문화 중 가장 재밌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자동차와 그와 관련된 부분이다.대도시라면 다르겠지만, 이곳 서배너는 교외 지역이기 때문에 자동차가 없으면 이동이 거의 불가능하다.당연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인도도 없는 경우가 많다.만 16세가 넘으면 운전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고, 얼마간의 슈퍼바이저와의 동승 기간을 보내고 나면 스스로 운전을 한다.가족 구성원의 숫자에 따라 자동차를 보유하고 있는 경우가 일반적이기도 하고,차고에서 웬만한 차량 정비는 스스로 한다.자동차는 이곳 사람들에게 필수재인 셈이다.그중 재밌는 것은 멈춤에 대한 약속이..

삶 이야기 2025.01.29

#6. 눈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그래봤자 미국에 온 지 일주일 남짓인데, 내 집에 온 것 마냥 마음이 편해졌다.다시 추워졌다. 이곳의 겨울은 우리나라의 초겨울 정도의 날씨인데, 크루즈 내내 반팔, 반바지로 생활했으니 다시 느낀 서배너의 겨울은 쌀랑했다.그 쌀랑함으로, 집에 돌아왔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눈이 왔다.시시각각 변하는 예보는 결국 조카들의 학교를 하루 더 쉬게 만들어줬고,새벽 소복하게 쌓인 눈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서배너에서 이 정도의 눈은 거의 5년 만이라고 했다. 그렇기에 부정확한 예보의 설레발에도 도시가 긴장했구나.그러니까 5살 아래의 아이들은 태어나서 처음 눈을 보는 것이다.단어로, 만화로 알고 있던 눈과 실제로 체험한 눈이 어떻게 달랐을까?반짝거리는 아이들의 눈을 상상해 보면 내 마음 또한 하..

삶 이야기 2025.01.27

#5. 누림

높은 확률로 다시없을 미국 여행을 왔다.우리가 머무는 조지아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디즈니 월드가 있다.디즈니랜드가 모여 있는 디즈니월드라니.9살이 된 아이에게 큰 선물이 될 것 같았다.아이와 함께 유튜브도 보고, 검색도 해보면서 디즈니 월드에 대한 상상을 펼쳐 나갔다.펼치면 펼칠수록, 본전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큰돈 들여 갔는데, 그만큼 즐기지 못하면 어떡하지?여러 가지를 고려해 보다 우린 결국 디즈니크루즈를 선택했다.아이는 디즈니월드던, 디즈니크루즈던 상관없이사촌형아, 누나와 함께 라면 만사 오케이, 땡큐다.이렇게 미국여행의 두 번째 밤을 보내고, 시차 적응도 되지 않은 채 디즈니크루즈에 탑승했다.아이들을 위한 판타지.그 판타지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돈.디즈니는 자본주의의 끝이라고 익히 들어왔다.크루즈..

삶 이야기 2025.01.26

#4. 나의 F들.

F는 나에게 과제였다.첫 번째 F는 해부학 시험이었다.단순 암기를 지독히도 싫어했던 나는 물리치료학을 전공하면서 해부학 역시 이해해 보려고 시도했었다.대학교 1학년생이 이해하기는 너무 깊고 방대한 내용이었던 해부학은 나에게 큰 시련이었다.결국 1학년 1학기, 해부학 시험에서 나는 이해의 덫에 빠져 F학점을 맞게 된다.웬만하면 D학점 이상을 주었던 교수님이 보기에도 너무 했던 거였겠지.충격을 받은 난 모든 걸 이해하며 지나갈 수 없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다.그 후 암기를 잘하는 내가 되었을까?딱 필요한 만큼 암기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그 부족한 부분을 이해로 채우는 게 좋아졌다.결국 지나고 보면 암기와 이해가 어우러져 내 것이 되어 간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두 번째 F는 기타였다.기타는 내 ..

삶 이야기 2025.01.25

#3. 시차적응

미국에 왔다.이곳 서배너는 한국으로 치자면 바닷가를 옆에 낀 조용한 항구 도시이다. 내가 40여 일을 머물 동네는 그중에서도 구석에 위치한 시골 마을이다.조카들이 학교에 가고,처형은 꼭 보여주고 싶었다던 호수로 우리를 안내했다.호수에 악어가 산다. 그렇다고 별 다른 안전장치는 없다.햇살이 매우 따뜻했다.바람은 살랑살랑 시원한 늦가을 감촉이었다.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호수 한 바퀴를 도는데, 여유로웠다.파이브가이즈에 갔고, 코스트코에 갔다.버거는 크고 자극적이었으며, 땅콩과 감자튀김은 짜고 자극적이었다.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거리를 둔다.스치듯 지나는 사람의 눈을 맞추고, 인사를 건넨다.잘 지나갈 수 있도록 비켜주고, 혹시라도 실례를 하지 않았는지 확인한다.영어에 무지한 나는,또 서양인에 대한 무의식적 두려..

삶 이야기 2025.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