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 9

#9. 내려놓음

실망시키면 어떻게 하지? 그게 너무 두려워.5살에 처음 만나 14년이 지나도록 깊이 사랑해 온,소중한 조카의 고민이 마음을 울렸다.성인이 될 준비를 해 나가는 한 사람의 성장통을 함께 겪는 것은고통스럽지만 그 자체로 매우 아름다운 경험이다.선택에는 답이 없다.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선택을 내린 후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뿐.그 선택에 책임과 노력을 다하는 것뿐임을 알아가고 있다.지난해 11월, 제주의 한 책방에서 만난 글귀는 나에게 하나의 이정표가 되어 가고 있다.신이여,어쩔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함을 주시고,어쩔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주시고,그리고 이를 구별하는 지혜도 주소서.내려놓아도 괜찮아.니가 가진 부담, 긴장, 경직, 외로움을 가만히 들여다보고,그것들도 너라는 사실을,너에게 그..

삶 이야기 2025.02.02

#8. '다음'이 없는 순간

햇살이 어스름하게 비치기 시작하는 새벽.아직 컴컴하고 조용한 집 안 침대에 누워 잠시 동안 고민했다.일어날까? 아니면 더 잘까?어차피 누워 있어도 다시 잠들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괜히 더 닝기적거리고 싶었던 마음이었을까.아내와 아이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일어났다.화장실에 가 입을 헹구고, 눈을 닦았다.고요하게 어두운 집 한 켠의 소파에 앉아 조명을 켜고 책을 들었다.으레 깔아 두던 피아노 연주곡도 틀지 않은 정적 안에서 순간에 집중하며 책을 읽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한국에서는 뭐에 그리 바쁘고 쫓기듯 살았을까?생각해 보면 항상 '다음'을 생각하고, 준비하는 데 생활이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었지 싶다.새벽에 눈이 떠지더라도, 그다음의 출근을.잠시 여유가 있더라도, 이제 뭐 먹지 하는 식사를.청소를, ..

삶 이야기 2025.01.31

#7. STOP

STOP 표지판이 보이면 속도를 0으로 만들고, 1~2초 주변을 살피고 출발한다.스쿨버스가 정차하면 같은 도로뿐 아니라 반대편 도로의 차들도 모두 멈춘다.미국의 문화 중 가장 재밌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자동차와 그와 관련된 부분이다.대도시라면 다르겠지만, 이곳 서배너는 교외 지역이기 때문에 자동차가 없으면 이동이 거의 불가능하다.당연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인도도 없는 경우가 많다.만 16세가 넘으면 운전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고, 얼마간의 슈퍼바이저와의 동승 기간을 보내고 나면 스스로 운전을 한다.가족 구성원의 숫자에 따라 자동차를 보유하고 있는 경우가 일반적이기도 하고,차고에서 웬만한 차량 정비는 스스로 한다.자동차는 이곳 사람들에게 필수재인 셈이다.그중 재밌는 것은 멈춤에 대한 약속이..

삶 이야기 2025.01.29

#6. 눈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그래봤자 미국에 온 지 일주일 남짓인데, 내 집에 온 것 마냥 마음이 편해졌다.다시 추워졌다. 이곳의 겨울은 우리나라의 초겨울 정도의 날씨인데, 크루즈 내내 반팔, 반바지로 생활했으니 다시 느낀 서배너의 겨울은 쌀랑했다.그 쌀랑함으로, 집에 돌아왔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눈이 왔다.시시각각 변하는 예보는 결국 조카들의 학교를 하루 더 쉬게 만들어줬고,새벽 소복하게 쌓인 눈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서배너에서 이 정도의 눈은 거의 5년 만이라고 했다. 그렇기에 부정확한 예보의 설레발에도 도시가 긴장했구나.그러니까 5살 아래의 아이들은 태어나서 처음 눈을 보는 것이다.단어로, 만화로 알고 있던 눈과 실제로 체험한 눈이 어떻게 달랐을까?반짝거리는 아이들의 눈을 상상해 보면 내 마음 또한 하..

삶 이야기 2025.01.27

#5. 누림

높은 확률로 다시없을 미국 여행을 왔다.우리가 머무는 조지아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디즈니 월드가 있다.디즈니랜드가 모여 있는 디즈니월드라니.9살이 된 아이에게 큰 선물이 될 것 같았다.아이와 함께 유튜브도 보고, 검색도 해보면서 디즈니 월드에 대한 상상을 펼쳐 나갔다.펼치면 펼칠수록, 본전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큰돈 들여 갔는데, 그만큼 즐기지 못하면 어떡하지?여러 가지를 고려해 보다 우린 결국 디즈니크루즈를 선택했다.아이는 디즈니월드던, 디즈니크루즈던 상관없이사촌형아, 누나와 함께 라면 만사 오케이, 땡큐다.이렇게 미국여행의 두 번째 밤을 보내고, 시차 적응도 되지 않은 채 디즈니크루즈에 탑승했다.아이들을 위한 판타지.그 판타지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돈.디즈니는 자본주의의 끝이라고 익히 들어왔다.크루즈..

삶 이야기 2025.01.26

#4. 나의 F들.

F는 나에게 과제였다.첫 번째 F는 해부학 시험이었다.단순 암기를 지독히도 싫어했던 나는 물리치료학을 전공하면서 해부학 역시 이해해 보려고 시도했었다.대학교 1학년생이 이해하기는 너무 깊고 방대한 내용이었던 해부학은 나에게 큰 시련이었다.결국 1학년 1학기, 해부학 시험에서 나는 이해의 덫에 빠져 F학점을 맞게 된다.웬만하면 D학점 이상을 주었던 교수님이 보기에도 너무 했던 거였겠지.충격을 받은 난 모든 걸 이해하며 지나갈 수 없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다.그 후 암기를 잘하는 내가 되었을까?딱 필요한 만큼 암기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그 부족한 부분을 이해로 채우는 게 좋아졌다.결국 지나고 보면 암기와 이해가 어우러져 내 것이 되어 간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두 번째 F는 기타였다.기타는 내 ..

삶 이야기 2025.01.25

#3. 시차적응

미국에 왔다.이곳 서배너는 한국으로 치자면 바닷가를 옆에 낀 조용한 항구 도시이다. 내가 40여 일을 머물 동네는 그중에서도 구석에 위치한 시골 마을이다.조카들이 학교에 가고,처형은 꼭 보여주고 싶었다던 호수로 우리를 안내했다.호수에 악어가 산다. 그렇다고 별 다른 안전장치는 없다.햇살이 매우 따뜻했다.바람은 살랑살랑 시원한 늦가을 감촉이었다.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호수 한 바퀴를 도는데, 여유로웠다.파이브가이즈에 갔고, 코스트코에 갔다.버거는 크고 자극적이었으며, 땅콩과 감자튀김은 짜고 자극적이었다.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거리를 둔다.스치듯 지나는 사람의 눈을 맞추고, 인사를 건넨다.잘 지나갈 수 있도록 비켜주고, 혹시라도 실례를 하지 않았는지 확인한다.영어에 무지한 나는,또 서양인에 대한 무의식적 두려..

삶 이야기 2025.01.23

#2. 비움

여행을 떠날 때 집을 정리한다는 것. 언제부턴가 우리 가족에게 매우 중요한 의식이 되어가고 있다.짧은 여행이나 캠핑을 떠날 때도 부지런히 짐을 싸고 집을 싹 정리한다. 처음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나비는 항상 여행을 떠날 때 집을 치우자고 한다.여행을 갔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마음이 편하고 싶어서라고 한다.여행을 떠나기도 전, 여행을 준비하면서부터 여행에서 돌아올 때를 준비한다니.그런데 그걸 몇번 경험하고 보니 알게 되었다.여행에서 돌아온 내집이 주는 느낌을, 기분을, 감정을 말이다.여행에서 쌓인 짐이 다시 내어지고, 집이 어지럽게 변해도 그 첫 마주함이 꽤나 포근함을 이제 알아버렸다는 것이다.그리고 비움.여행에서 가지고 온 새로운 경험에서 얻어진 무엇인가와 함께 변화한 우리와 집.분명 같은 사람과 같..

삶 이야기 2025.01.22

#1. 말랑임에 출렁이다.

몸과 머리가 말랑해질 수 있을까?지난 십육년 간 쌓여 딱딱하게 굳어진 나에게 쉼이 윤활유가 되기를 기대하며,미국으로 떠나왔다.미국을 오며 준비한 건 거의 없었다.소중한 가족을 만나러 오는 길이기 때문이겠지만,그것보다는 미국 여행이 나에게 들뜸으로 다가오지 않았던 것이 더욱 컸기 때문이기도 하다.말랑해지고 싶다.이 마음이 나에게는 지금 글을 쓰며 몇 번이고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는 나의 현재와 같다.낯섦을 발견하고, 생각으로 시작해 꼬리를 물고, 그것을 글로 표현하는 것이 '나'를 설명해 준다고 생각했었다.그런데,벌써 몇 번째 막히고 있다. 글이 이어지지 않는다.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과 별개로,한동안 난 매일 글을 쓰겠다는 다짐을 하고, 그 다짐을 딱딱한 몸과 마음 안으로 밀어 넣었다.역시 그 외면..

삶 이야기 2025.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