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이야기

#8. '다음'이 없는 순간

왕구리 2025. 1. 31. 00:31

햇살이 어스름하게 비치기 시작하는 새벽.
아직 컴컴하고 조용한 집 안 침대에 누워 잠시 동안 고민했다.

일어날까? 아니면 더 잘까?

어차피 누워 있어도 다시 잠들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괜히 더 닝기적거리고 싶었던 마음이었을까.

아내와 아이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화장실에 가 입을 헹구고, 눈을 닦았다.
고요하게 어두운 집 한 켠의 소파에 앉아 조명을 켜고 책을 들었다.


으레 깔아 두던 피아노 연주곡도 틀지 않은 정적 안에서 순간에 집중하며 책을 읽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한국에서는 뭐에 그리 바쁘고 쫓기듯 살았을까?
생각해 보면 항상 '다음'을 생각하고, 준비하는 데 생활이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었지 싶다.
새벽에 눈이 떠지더라도, 그다음의 출근을.
잠시 여유가 있더라도, 이제 뭐 먹지 하는 식사를.
청소를, 공부를, 일을, 아이와의 시간을, 관계를.

'다음'을 걷어내고,
순간에 집중하는 게 얼마만인가.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나에게 집중된 순간으로 이루어진 희열을 느껴본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부스스한 머리와 나른한 몸짓으로 아이가 나오며 건너편 소파에 앉는다.

아빠, 책 보고 있었어? 언제부터 있었어?

물으며 눈을 비빈다.

이어지는 간단한 대화 후 아이도 책을 보기 시작한다.
그렇게 또 이어진 다음이 없는 나만의 시간들.

어느새 따뜻한 햇살이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고 있다.



소설책을 든 건 정말 오랜만이다.
다독가는 아니지만 책을 좋아하는 편인데, 몇 년 근래에 읽었던 책은 온통 무거운, 일에 도움이 되는 책이었다.
긴 호흡으로 스토리를 따라 타인의 삶을 느껴보며 읽어나가는 소설은 수많은 '다음'에 어울리지 않았다.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만 해놓은 채 미뤄왔던,
때마침 적절한 시류에 편승하여,
이번 여행은 한강 작가의 책 두 권과 몇 개의 책을 가져왔다.

오랜만에, '다음'을 생각하지 않고 순간에 집중하며 읽은 소설책이 한강이라니.
고통과 연민, 연대의 감정으로 눈물 흘리며 읽어나간 '소년이 온다'
나라는 존재에 대한 처절한 몸부림과 타인들의 폭력에 치가 떨린 '채식주의자'
두 소설을 며칠의 순간의 시간들에 읽어 내렸다.

한강과 함께 한 이 귀한 시간이 오래도록 기억날 것 같다.



나에게는 이 소설을 껴안을 힘이 있다. 여전히 생생한 고통과 질문으로 가득 찬 이 책을.

채식주의자의 마지막, 새로 쓴 작가의 말 속 한 구절처럼
난 내 삶의 전부, 혹은 일부를 껴안을 힘이 있을까?

지난 2년 간 무의식처럼 읊조리던
난 절대 내 일상을 무너뜨리지 않을 것이다.
라고 했던 문장이 갑자기 외면과 회피로 느껴졌다.

난 내 삶을 껴안을 힘이 있을까?

그것으로부터 더 깊이, 나와 내 삶에 대한 사랑이 뿌리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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