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3번밖에 안 넘어졌어요. 정말 대단하죠?
오늘은 손도 잡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답답한 집 안에서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아이와 함께 집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닌 지 벌써 4주 차입니다.
놀이터에도 가고, 동네 산책도 하며 이런저런 추억이 쌓이고 있어요.
그냥 별 과제나 계획된 활동이 없이도 그때, 그 순간의 아이의 마음에 맞춰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사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입장에서 항상 무언가를 준비하죠.
'오늘은 날씨가 더우니까, 놀이터에 갔다가 수도꼭지를 이용해서 물놀이도 좀 하고, 그네도 좀 타고, 간식도 먹아야지.'
큰 줄기의 활동 내용을 머릿속에 넣어놓고 가곤 하지만 아이를 만나면 무용지물이 되기 일쑤였습니다.
"선생님! 오늘 산책해요!"
"그러자!"
이렇게 시작된 동네 산책은 우리에게 좋은 추억거리를 안겨주고 있습니다.
천천히 한 발씩 디뎌보며 동네를 살핀다는 게 생각보다 재밌습니다.
꽤 빽빽한 빌라들이 밀집한 지역이라 골목길에 차도 쌩쌩 다니고, 이런저런 장애물도 많습니다.
평소에 많이 다녔는지 물어보면, 그렇지 않았다고 해요.
주로 어떤 목적을 가지고 길을 다녔다고 합니다. 슈퍼에 가거나, 놀이터에 가거나 하는 것이죠.
그런데 별 목적 없이 동네를 돌아다닌 다는 것이 아이에게도 참 재밌었나 봅니다.
무언가 모험을 떠나는 것처럼 느껴졌을까요?
소소하지만 재밌는 걸 발견하고 우스꽝스러운 말을 하는 게 참 재미있는 아이입니다.
그렇게 40분 동안 돌아다니고, 마지막에 들른 집 바로 옆 단골 슈퍼에서 간식을 사 먹는 재미 또한 빼먹을 수 없지요.
지난주엔 사탕을, 이번 주엔 마이*를 사곤 기분이 좋은지 환히 웃습니다.
울퉁불퉁 동네를 걸어 다니다 보면, 넘어지기도 많이 넘어집니다.
손을 잡아도 넘어지기 쉬운 아이는 주로 방향을 바꾸거나, 속도를 조절하거나, 혹은 자그마한 턱이나 장애물에 넘어지지요.
이유가 무엇일까?.. 왜 아이가 이리도 잘 넘어질까?라는 것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지 고민이었습니다.
뇌성마비인 아이가 가진 많은 어려움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지만,
산책을 좋아하고, 놀이터를 좋아하며, 형아랑 놀기, 엄마랑 함께 있기, 물고기를 좋아하는 5살인 이 아이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민하던 차에, 아이가 갑자기 외칩니다.
"나 손 놓고 갈래!"
멋지다고 칭찬해주곤 옆에서 걸으며 위험하지 않도록만 도와주었어요.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었습니다.
가다가 멈추고 하수구를 한참이나 관찰하고,
신기하게 생긴 벽돌벽을 만져보고,
나뭇가지를 찾아다니고,
온통 신기한 수많은 집들을 가리키며 깔깔거렸습니다.
저는 그냥 옆에서 같이 걸으며, 차가 오면 잠시 멈출 수 있게 도와주고
이따금 아이가 속도를 조절하며 넘어지지 않게 걸을 수 있도록 조언하고, 칭찬해주는 것 밖에 없었어요.
아참, 또 하나. 가장 중요한 칭찬이었습니다.
아이가 스스로 하겠다고 한 이 위대한 과제에 대한 의미와 열심히 하고 있는 아이의 태도에 대해 끊임없이 칭찬해주었죠.
손을 잡아도 잘 넘어지던 아이가 그날은
손을 안 잡고도 몇 번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내심 많이 놀랐던 시간이었습니다.
아이의 활동량과 수행도를 제가 과소평가하고 있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왜 못할까? 왜 어려워할까? 고민보다,
아이가 뭘 잘할까? 어떤 걸 좋아할까? 하는 고민을 더 했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해봤습니다.
아이에게 좋은 어른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보고, 인정해줄 수 있는 치료사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이의 성장에 한 뼘만큼이라도 긍정적인 성장을 미칠 수 있는 전문가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모든 걸 떠나, 아이의 입장에서 '나'란 사람이 함께 있으면 즐거운 사람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진심으로 해보게 되었습니다.
물음표보다 동그라미를,
장애보다 아이가,
치료보다 성장을,
재활디딤돌.
재활디딤돌 프로그램은
도봉구에 거주하는 만 6세 이하의 정도가 심한 뇌병변 장애 아동과 가정이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지속적이며, 일상생활환경 중심 프로그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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